[유석재의 돌발史전] 102개 뼛조각이 밝혀낸 ‘익산 백제왕릉’의 주인
[유석재의 돌발史전] 102개 뼛조각이 밝혀낸 ‘익산 백제왕릉’의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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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웅 화백이 그린 백제 무왕의 정부표준영정(2001).
충남 공주 왕릉원에 있는 백제 왕릉 7기는 1971년 발굴된 무령왕릉을 제외하고는 그 주인이 밝혀지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의 조사에서 ‘2호분’의 주인이 14세에 죽은 백제 23대 왕 삼근왕(재위 477~479)일 가능성이 크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어금니 두 점이 나와 법의학적 조사를 해 보니 ‘십대 중후반 청소년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어린 나이에 왕이 됐지만 후사 없이 쓸쓸하게 세상을 떠난 잊힌 왕이 1500여 년 만에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된 셈입니다.
그렇다면 이 ‘삼근왕릉’은 무령왕릉 이후 두 번째로 주인이 밝혀진 백제 무덤일까요? 아닙니다. 사실상 세 번째입니다4대보험 가입하기
. 몇 년 전에 전북 익산에 있는 ‘쌍릉’이 무왕릉인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백제 30대 임금인 무왕(재위 600~641)은 향가 ‘서동요’의 작자이자 신라의 선화공주와 결혼했다고 알려진 임금이자 백제 마지막 왕 의자왕의 아버지입니다.
익산 쌍릉은 말 그대로 두 개의 무덤으로 이뤄져 있는 곳입니다. 180m를 사이에 두고 ‘대왕릉’과외화증권
‘소왕릉’이 있습니다. 발굴과 조사를 할 때마다 예상을 뛰어넘는 ‘반전의 반전’이 이뤄졌던 곳이기도 합니다. 이 무덤은 기원전 2세기 위만에게 쫓겨 남쪽으로 내려온 뒤 삼한의 전신인 진국(辰國)을 세웠다는 준왕의 무덤으로 알려지기도 했습니다만, 무덤 양식이 백제 말기의 것이었습니다.
무왕 얘기로 돌아가 보죠. 그가 왕위에 오르기 전 꾀를저렴한 중고차
써서 신라 진평왕의 땅 선화공주와 결혼했다는 ‘삼국유사’ 기록에 대해 학자들 중엔 “당시 백제와 신라의 관계를 미뤄볼 때 믿을 수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사람들은 대체로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런데 2009년 이 이야기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을 보여주는 발굴 결과가 나왔습니다. 무왕 때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익산 미륵사지석탑을 해컨벌루션
체했을 때 탑을 만들었던 당시의 문서가 하나 발견됐는데, 이 글에 ‘백제 왕후는 사택적덕의 따님’이라고 기록된 것입니다. ‘사택적덕’에서 사택은 성(姓), 적덕이 이름입니다. 사택 가문은 백제에서 가장 세력이 컸던 귀족이었습니다.
무왕의 왕비가 신라에서 온 선화공주가 아니라 백제 귀족 출신이었다고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일각에선 ‘서동정부지원저신용자대출
요는 가짜였다’는 헤드라인을 내걸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무왕이 여러 왕후를 뒀을 수 있지 않느냐”는 반론을 제기했습니다. 2011년 TV 드라마 ‘계백’에서는 선화공주가 죽은 뒤 사택적덕의 딸이 무왕의 새 왕비가 된 것으로 설정했습니다. 여기서 ‘사택비’는 권모술수에 능한 악역으로 나왔는데 오연수가 그 역할을 맡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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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선화공주와 사택비는 동일인물이었을 것이다…”
백제 최고 귀족의 딸로 ‘고귀한 신분의 왕비’였을 사택비가 세월이 흘러 ‘신라 공주 출신’으로 각색됐을 것이라는 얘깁니다.
전북 익산 쌍릉 대왕묘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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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거나 선화공주가 정말 무왕의 왕비였다면, 과연 어디에 묻혔을까? 사람들은 익산의 쌍릉을 주목했습니다. ‘고려사’에는 쌍릉이 ‘백제 무왕과 왕비의 무덤’이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무왕의 고향도 익산이었습니다. 학자들은 쌍릉 중 ‘대왕릉’은 무왕, ‘소왕릉’은 무왕비의 무덤이라고 생각했습니다.그런데 2016년 한 차성공하는1%직장인
례의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국립전주박물관이 대왕릉에서 나온 치아를 분석해 “20~40세 여성의 것일 가능성이 크다”고 발표한 것입니다. ‘대왕릉은 무왕이 아닌 선화공주의 무덤’이라는 주장이 나왔습니다. 대왕릉에서 나온 유물 중 신라 양식의 토기가 있다는 점도 근거가 됐다는 것입니다.
2년 뒤인 2018년에 다시 반전이 일어납니다. 새로운 은행적금금리비교
발굴 조사를 해 보니 대왕릉에서 사람 뼈가 담긴 낡은 나무 상자가 나왔던 것입니다. 이것은 1917년 조선총독부가 쌍릉을 처음 발굴했을 때 파냈다가 다시 묻은 것으로 판명됐습니다. 모두 102조각에 달하는 뼈를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4개월 동안 정밀 분석한 결과 “살아 있을 때 넘어져 다친 적이 있는 키 161~170㎝의 60대 이상 남성”이라는 결론이 나라라아틀리에
왔습니다.
지금 기준으론 큰 체격이라고 할 수 없겠지만, 조선시대 성인 남성의 평균 키 161.1㎝와 비교하면 큰 편이었습니다. 이게 왜 중요하느냐 하면, ‘삼국사기’에 무왕이 ‘풍채가 훌륭하고 뜻이 호방하며 기상이 걸출하다’고 기록돼 있기 때문입니다. 유골 주인공의 사망 연도는 서기 620~659년으로 추정됐는데, 무왕은 641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빙고.
익산 쌍릉의 대왕릉은 무왕릉으로 사실상 확정된 것입니다.
남은 두 가지 의문. 그럼 앞서 ‘이빨이 여성이다’라고 추정한 것은 어떻게 된 것인가? 한 가지 결론으로 수렴됩니다. ‘오류!’
또 하나는 ‘그럼 소왕릉은 주인은 누구인가?’ 2019년까지 소왕릉 발굴 조사가 진행됐는데… 도굴이 심해 사실상 빈 무덤에 가까웠다고 합니다. 결국 전문가들은 소왕릉의 주인에 대해 이런 결론을 지었습니다.
‘선화공주, 사택왕후, 아니면 또 다른 인물일 가능성이 있다’(=잘 모르겠다)
어쨌든 유골이 지금까지 보존된 백제 임금은 무왕과 이번에 어금니가 나온 삼근왕까지 두 명이 된 셈입니다. 무왕은 ‘대외 전쟁에서 여러 차례 이겼고 잠시 불안했던 백제의 정국을 안정기로 돌려 놓은 중흥 군주’라는 긍정적인 평과, ‘외교적으로 신의를 잃었고, 안으로는 사치에 빠졌다’는 부정적인 평이 엇갈립니다.
사실 또 하나 주인이 밝혀질 것 같은, 아니면 사람들이 밝히고 싶어 하는 백제 왕릉이 중국에 또 하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북망산(=낙양성 십리 허)에 있다는 의자왕릉인데, 발굴이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무덤과 무덤의 주인을 연결시키긴 부정확합니다. 다만 북망산의 흙을 옮겨 와 조성한 곳이 부여 능산리 고분군에 있는 의자왕의 가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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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석재의 돌발史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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