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석재의 돌발史전] 서길수 교수는 왜 中 공항서 입국 거부당했나

[유석재의 돌발史전] 서길수 교수는 왜 中 공항서 입국 거부당했나

[유석재의 돌발史전] 서길수 교수는 왜 中 공항서 입국 거부당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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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5월 6일 오전 10시 14분 중국 선양(瀋陽) 공항에서 서길수(가운데 빨간 모자 쓴 이) 교수가 중국 당국으로부터 입국을 불허 당한 뒤 보안 담당 직원 두 명에게 이끌려 출국장으로 압송 당하고 있다. /서길수 교수 제공 서길수(81) 전 서경대 교수는 고구려사를 연구하며 중국의 ‘동북공정’을 줄곧 비판해 온 인물이었습니다. 고구려연구회 회장이었던 그는 강단의 다른 학자들과는 구분되는 대단한 열정이 넘쳤습니다. 이대로 넘어간다면, 이대로 잊는다면 중국은 고구려사는 물론 한국 고대사 전체를 삼킬 것이라고 늘 경고했습니다. 이 ‘돌발史전’ 코너에서도 그와 관련된 내용을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중국이 백제·신라 역사도 강탈!” 그러나 사람들이바보
은 믿지 않았다 https://www.chosun.com/culture-life/relion-academia/2022/09/23/FQ5LAFPUJZBQRPWU23YZK5ATIM/) 그가 10년 만에 중국행 비행기를 탔습니다. 고구려·발해 유적 답사단 16명과 함께였습니다. 지난 6일 오전 10시 무렵이었습니다. 선양(瀋陽) 공항에서 여권을자동차 회사 마크
보여주고 입국 절차를 밟고 있었는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습니다. 입국이 거부됐다는 것입니다. 입국 거부의 사유를 알려달라고 하자 “우린 모른다”는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서 교수는 보안 담당 직원 두 사람에게 이끌려 출국장으로 압송 당했습니다. 타고 갔던 대한항공 KE831편을 타고 인천공항으로 되돌아왔습니다. 선양의 한국 영사관을 통해 ltv
이유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으나 중국 측은 묵묵부답이었습니다. 26일 서 교수에게 연락을 해 온 영사관 측에선 “중국 측에서 아무런 대답이 없어 다시 물어보는 중”이라고 말했습니다. 서길수 전 서경대 교수가 지난 6일 중국 선양(瀋陽) 공항에서 중국 입국이 불허된 뒤 인천공전세자금추가대출
항으로 돌아와 대한항공 직원에게서 받은 '입국 불허' 서류를 들어보이고 있다. /서길수 교수 제공 서 교수는 “지금까지 고구려 유적 답사 등의 목적으로 30차례 넘게 중국에 입국했고, 마지막으로 중국에 갔던 2015년에도 입국에 별문제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중국이 최근 시진핑 체제에서 파산상담개인회생헬프119
대외적인 태도가 대단히 경직되게 바뀌었다는 것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서 교수가 귀국한 뒤 남은 답사단은 중국 당국으로부터 강도 높은 압박을 받았습니다. 이름, 나이, 여권번호는 이미 제출된 상태였는데, 거기다 학벌과 직업을 대라고 요구 받았다는 것입니다. 답사단은 “학벌은 한국에서 대기업 채용에서도 묻지 않는다”고 반발하고 직업만 써냈다홈플러스인터넷
고 합니다. 둘째 날에는 “정년퇴직한 사람은 퇴직 전에 어떤 직업에 종사했는지 쓰고, 주부라고 쓴 사람은 주소를 자세히 쓰라”고 요구했다고 합니다. 유적 답사 일정 중 상당 부분이 입장 거부되거나 취소됐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차량과 인력이 계속 따라다니며 감시했다고 합니다. 숙소에선 각자 여권을 든 개인 사진을 촬영한 뒤에야 방 열쇠를 kt카드사
줬다는 것입니다. 왜 중국 당국은 한국 전문가나 기자의 고구려 유적 답사를 막는 것일까요. 서 교수는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가 중국사의 일부라고 주장하는 동북공정의 왜곡 자체가 대외적으로 알려지는 것을 꺼리기 때문”이라고 봤습니다. 현재 중국 동북(만주) 지역의 역사왜곡은 심각한 수준입니다. 퉁화(通化) 박물관의 경우 “고구려는 우리나라(공사 채용공고
중국) 변경의 민족 정권”이라고 버젓이 써놓았다는 것입니다. 서 교수는 답사단이 촬영해 온 사진을 보다 옌볜대 정문 앞 길에 나부끼는 광고 깃발을 보며 중국의 속셈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중화민족일가친(中華民族一家親), 동심공축중국몽(同心共築中國夢).” ‘중화 민족은 한 부모, 마음 합쳐 함께 중국 꿈을 이루자”는 것입니다. 이저소득층정부대출
‘중화민족’이란 한족과 55개 소수민족이 모두 한 민족이라는 황당한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의 개념입니다. ‘중국조선족’ 역시 ‘중화민족의 일부를 이루는 한 민족’이 됩니다. 동북공정을 획책해 온 중국의 진짜 속셈은 이것이었습니다. 저는 서 교수의 답사단 일원으로 함께 중국에 가 취재한 적이 있었습니다. 2004년이니 벌써 21년 전의 일대출금 연체
이었습니다. 중국 당국자들은 주요 지점마다 마중을 나와 서 교수를 환대하는 척 했지만 은근히 감시하는 모습이 물씬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답사를 방해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현재 중국 영토의 일부는 대한민국 영토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얼마든지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학자입니다. 그런데도 중국은 그의 입국조차 막았습니다. 이렇게 협량(狹量)의 극치를 달리고 있는 나라가 현재 시진핑 체제하의 중국인 것입니다. 2009년 서길수 교수가 정년을 맞았을 때, 지인 192명이 함께 쓴 문집 ‘맑은나라 사람들’이 출간됐습니다. 이 책에는 제가 쓴 글도 있었습니다. 남산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다시 보니 예전의 기억이 새삼 떠오릅니다. 원문 중 정년문집이라는 매체의 특성에 맞게 ‘선생님’이라 쓴 부분 중 ‘님’자만 생략한 채로 그 글을 여기 실어 봅니다. ========== 2003년 8월 23일 서울 프레스센터. ‘탈(脫) 민족주의’를 주장하는 국내 일부 학자들이 ‘국사의 해체를 위하여’라는 제목의 심포지엄을 열었다. 그들은 국사(國史)가 ‘억압이며 은폐’이며 ‘역사를 일국사의 틀 안에 가둬버린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런데 정작 국내의 그 기라성 같은 한국사학자들은 플로어에 묵묵히 앉아 있을 뿐, 누구도 한 마디 반박을 펼치는 사람이 없었다. 그 때, 단 한 사람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외모가 다소 촌부(村夫)와 흡사해 처음에는 학자인줄도 몰랐다. “동아시아 주변국 모두가 민족주의를 강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만 스스로 국사를 없애 버리겠다는 것인가? 그러고서도 중국의 고대사 왜곡에 대해 반박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가?” 주최 측의 어느 한 사람도 이 질문에 대해 답변하지 않았다. 그날, 그 자리에 있던 한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 중에서 비겁하지 않은 사람은 그 혼자뿐이었다. 그것이 내가 서길수 선생을 처음 본 날이었다. 나는 2003년부터 조선일보 문화부의 학술 담당 기자로 일하면서 때마침 불거진 ‘동북공정’이란 큰 파도에 맞서 수많은 기사를 썼고, 여러 차례 선생의 도움을 받았다. 지금 생각하면 아버지뻘 되는 그와 함께 머리를 맞대고 분노하며 의논한 일이 참으로 많았다. 고구려사와 관련해서 어디선가 문제점을 발견하면 가장 먼저 그에게 전화를 걸었고, 그는 아무리 늦은 시각이라도 항상 반갑게 전화를 받았다. 학술 세미나장에서 앞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펴 놓고 기다리는 나를 보면 늘 “유 기자, 또 이렇게 부지런히 왔군!”이라며 무척 기뻐했다. 장군총 앞에서 한국인들이 촬영한 최초의 사진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자정 넘은 시각 폭우를 뚫고 차를 몰아 동교동 ‘DJ 옛집’ 근처에 있는 선생의 연구실을 찾은 적도 있었다. 그는 내가 쓴 기사를 보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고, 때로는 따끔한 질책을 하기도 했다. 내가 들고 간 자료로 인해 선생이 책 한 권을 쓰게 된 일도 있었다. 2005년 4월 어느 날, 나는 한 취재원으로부터 입수한 프랑스 자료를 가지고 선생을 찾았다. 그것은 1907년 프랑스 학자 에두아르 샤반느가 낸 ‘한국의 고대 왕국 고구려 유적에 대한 보고서’였다. 내가 관심을 가진 것은 그 보고서에 실린 광개토대왕비의 사진이었다. “이 사진이 혹시 현존하는 광개토대왕비 사진 자료 중에서 가장 오래 된 것이 아닙니까?” 선생은 그 즉시 자료에 대한 연구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에스페란토로 연결된 전 세계 네트워크를 통해 자문을 구하고 현지를 방문헸다. 파리 기메박물관에서는 나흘 동안 도서관 서고와 수장고까지 들어가 자료와 유물을 일일이 촬영하고 유리원판 사진을 수집했다. 그 연구 성과는 ‘한말 유럽 학자의 고구려 연구’(여유당)라는 제목으로 2007년에 출간됐고, 선생은 책 서두 ‘감사드리는 글’에서 나와의 사연을 밝혔다. 하지만 가장 잊히지 않는 추억은 역시 2004년 10월, 선생의 배려로 대학생 고구려 역사유적 답사 행사에 취재기자로 참여하게 된 일이었다. 심양과 환인, 집안으로 이어진 그 여정에서 나는 진정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오녀산성 일대의 장려한 분위기만큼이나 인상적이었던 것은 선생의 에너지였다. 기자란 사람을 무척 많이 만나는 직업임에도, 나는 지금까지 그처럼 열정이 넘치는 사람을 본 일이 없다. 조끼와 추리닝 바지, 등산화 차림의 그는 유적만 보이면 늘 어느 젊은 학생들보다도 먼저 뛰어가서 자세히 관찰하고 사진을 촬영했다. 셔터를 누를 때 그의 눈빛은 환희로 가득 차 있는 듯했다. 그가 그곳에 처음 왔던 것일 리 없다. 그런데도 고구려 유적을 대하는 그의 모습은 마치 오랫동안 헤어졌던 가족과 상봉하는 듯했다. 옷 곳곳이 철조망과 나뭇가지에 걸리고 찔려 찢어질 지경이어도 땀으로 푹 젖은 그의 얼굴은 항상 환했다. 아무리 열심히 뛰어다닌 날이라도, 그 다음 날 아침에 그는 어제와 같은 모습으로 사람들 앞에 나타났다.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한 번도 겹친 적이 없었다. 환인의 오녀산성 아래에서 처음으로 고구려 산성을 발견한 이야기, 고구려 산성을 찾기 위해 산 속을 헤맬 무렵이면 항상 어디선가 웬 노인 한 명이 나타나서 인도했다는 이야기… 선생의 순수한 열정이야말로 언제나 다른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촉매제였다. 그는 한중간 고대사의 숱한 쟁점들에 있어서 항상 당당했고, 눈치를 보지 않았으며, 명료한 논리로 사람들을 설득했다. 국내 고구려 연구자 수가 적다는 학계 일각의 ‘엄살’에는 “석·박사 합해서 200명이 넘는다”는 수치를 내놓으며 “우리가 중국보다 뒤진 것은 고구려사 연구 자체가 아니라 ‘고구려가 어느 나라 역사인가’라는 정체성의 문제였을 뿐”이라고 말했다. 고구려 출신의 장군 고선지와 이정기를 흠모하는 일부 사람들에 대해서는 “만일 일제시대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장군이 된 조선 사람이 진주만을 폭격했다면 위대한 우리나라 장군이라고 하겠느냐”고 말했다. 동북공정 문제가 수면 아래로 가라앉자 “한중 역사전쟁은 수도권 빼놓고 중국에게 점령당한 뒤 휴전해 버린 것이나 다름없다. 정신없는 백성은 정신없는 역사를 낳는다”고 일갈하기도 했다. 동북공정 문제가 불거진 2003년부터 지금까지 지켜 본 결과, 이런 통렬한 직언(直言)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에너지는 예측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아무리 크고 복잡한 학술대회라도, 아무리 방대한 논문이나 저서라도, 아무리 까다로운 해외 답사 일정이라도, 그는 별 바쁜 기색도 없이 닥친 일들을 척척 해 내고는 또 다시 다음 일을 꾸몄다. 그러면서 가족신문까지 만들어 냈다. 솔직히 이런 일들 모두를 지금까지도 논리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한 번은 이런 말을 내게 한 적이 있다. “밤을 새워 일하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는가?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밤을 새우고 난 뒤 ‘아, 나는 이제 밤을 새웠으니 좀 자야 돼’라는 생각이 스스로 드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합리화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마음의 소리’에서 불륨만 낮춰 놓으면 실제로 잠이 오지는 않는 사람이 바로 서길수 선생이었던 것이다. (후략) ▶‘유석재의 돌발史전’은 역사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입니다. 뉴스의 홍수 속에서 한 줄기 역사의 단면이 드러나는 지점을 잡아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매주 금요일 새벽 여러분을 찾아뵙겠습니다. 뉴스의 홍수 속에서 한 줄기 역사의 단면이 드러나는 지점을 잡아 설명해드립니다. 돌발史전 구독하기(https://www.chosun.com/tag/your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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